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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아들과 엄마

장애아동은 어떤 어린이집을 다닐까? (부제:장애전담어린이집 입성기)

장애아동은 환영받지 못한다... 어린이집에서도 ....

제이든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병원생활을 시작한 날.. 어렴풋이 생각했다. 어쩌면 제이든은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잘 벼텨서 어찌저찌 퇴원을 했다. 경련이 잡혔고 시져프리(seizure free:경련이 없는 기간)이 늘수록 언제 아팠냐는듯이 잘 크겠지? 하는 기대감도 사실 컸다.
건강하게 클 줄 알았다. 
12개월이 넘었는데도 네발로 기어다니기만 했다. 18개월이 넘어서야 걷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는... 딱 12개월까지가 우리아이의 정상발달 기록이다. "엄마, daddy, 앉아, 까까"까지 말했던 아이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고 옹알이조차도 하지 않는다는걸 알아차렸을때는 이미 18개월이 넘었던 시점이었다.  
그 이후로 제이든은 다시 신생아가 되었다. 인형같이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화도내지 않았다.
표정도 없었고 공감도 못했고, 통증에 대한 예민도도 낮았다. 다쳐도 아프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슬프게도 가정어린이집에서는 제이든은 참 얌전하고 케어하기 수월한 아이였다.
 
하지만 2번째 옮긴 관리동 어린이집에서 제이든의 자폐성향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제이든은 말을 잃어버렸다. 머리를 세게 박는 자해행동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날은 오전내내 머리를 박으며 교실 구석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언어치료를 하러가면 40분내내 울다가 나왔다. 원장님은 틈만나면 면담을 요청하셨다. 급기야 제이든이 머리를 박는 행위를 친구들이 따라해서 피해가 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다...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가졌던 초기 코로나.  나는 레벨D를 입고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던 간호사..코로나에 접촉이 될 확률이 크다며 관리동 어린이집 원장님은 원아들의 건강이 심히 걱정이 된다며 등원을 거부당했다... 두 아이가 잠재적 코로나 바이러스 전파자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상처만 가득 안고 큰아이가 6살 되던해에 기독교재단 사회법인인 노*어린이집으로 옮겼다.
 
옮긴 3번째 어린이집은 두 아이에게 최고의  환경이었다. 진작에 옮길걸 후회할만큼... 허름한 시골 학교같은 건물에 문을 열고 나오면 커다란 느티나무에 의자가 둘러있었고, 그네도 있고, 잔디밭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논밭으로 뛰어다니며 자연에서 놀면서 하루를 보내는 곳이었다. 어린이집선생님은 유학파. 그래서 아이아빠와도 의사소통이 잘되었다. 큰아이는 정말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으리라... 제이든은 초반에는 자연으로 힐링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텐트럼(분노발작)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선생님들이 버거워하는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까...하루는 선생님의 노트북을 던져서 두동강이 났다. 돌발행동이 많아졌다. 문이 열리면 직진본능으로 차가 다니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내달렸다. 선생님이 제이든을 잡으려다 다쳤다. 너무 죄송했다. 그무렵 나는 특수교육청에 내년에 다닐 특수유치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제이든나이 5살. 특수반이 있는 유치원으로 옮기려면 내년3월. 선생님들도 내년 3월을 바라보며 제이든을 위태롭게 잡고 있었다. 큰애가 외국인학교 킨더가든으로 옮길 시점.. 육아휴직을 고민하던 때였다. 
 
원장님께서 밤 11시가 다되어 전화로 면담을 요청하셨다. 내가 퇴근할 시간까지 기다리신거다. 어떻게든 데리고 내년까지 가고 싶었는데 선생님도 힘들어하고 3세반의 보고교사가 제이든을 전담하듯이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아이들 케어가 힘들어졌었다고 한다. 육아휴직을 고민하신다고 하니 가정보육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실질적인 퇴소요구였다. 그런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이 노력하신걸 내가... 부인할 수가 없었다. 7월 초까지 다니고 제이든의 퇴소가 결정되었다. 
퇴소하던 날 선생님들께서 날 먼저 안아주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힘내라는 말과 함께... 아이의 상태를 못받아들이고 있는 남편을 익히 아셨던 터라 내가 많이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처음으로 울컥 눈물이 났다.
 

장애아동부모의 마지막 선택지 : 절망이자 희망인 곳

제이든이 다닐만한 어린이집을 우선 찾아보자 싶었다. 내가 있는 곳은 아산시 둔포면. 아산시에는 장애전담어린이집이 하나 있었다. 교사 1명당 아이2명. 지체장애아 위주인듯 했고 역시나 내년까지는 자리가없다고 하였다. (이 당시 제이든은 장애판정을 받기 전이다.) 아산시, 천안시, 평택시, 안성시까지.. 통합반, 특수반이 있는 어린이집에 모조리 전화를 돌렸다. 아이사랑어플도 보면서... 50여군데를 전화했던것 같다. 단 한곳도 제이든을 받아줄 곳이 없었다.  절망했다... 네개의 도시에서 어린이집을 알아보면서 난 느린아이들이 다닐 어린이집이 이렇게나 없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인구가 16만명이나 되는 평택시에도 장애전담어린이집이 하나도 없다는 거에도 큰 충격...
다 체념하고 있을즈음  안성시에 있는 장애전담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한 아이가 이사하면서 퇴소를 한것 같았다. 다문화가정+ 맞벌이가정인 제이든이 1순위가 될 것 같은데 괜찮겠냐고... 그당시 제이든 뒤로 같은 나이대에 대기자는 36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해서 제이든은 장애전담 어린이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산시-평택시-안성시를 오가야 하지만 그런 수고로움은 기꺼이 감수하리라. 우리 제이든이 여느 아이들과 똑같이 어린이집을 다닐 수만 있다면... 입소가 결정이 되고 남편과 함께 어린이집을 다녀온 날 남편은 절망했다. 신랑 생각엔... 정상이지만 그저 좀 느린 내 아이를 장애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보내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분노+(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는)약간의 안심"이었다.
반면 나는 "희망+ 안도감 +(결국 여기로 올수밖에 없었다는)슬픔"이었다.

내 아이가 처음 마주한 유리천장이었다.
(제이든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유리천장을 맞닥뜨리게 될까...)

장애전담어린이집을 다니고 나서야 제이든은 안정을 찾았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다행히 제이든은 장애전담어린이집으로 옮기고 나서 안정도 되고 엄청 많이 성장했다. 다음에 자세히 써봐야겠다.

이번에 감자캐러 간 사진. 선생님 모자쓰고 한컷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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